2025.12.07 새로운개혁교회 주일예배 “당신이 기다리는 것”(창세기 15:1-6) – 김도완 목사

12월 6, 2025

Series: 주일예배

Book: 창세기

창 15:1-6/당신이 기다리는 것

251207 대강절2

1. 힘겨운 기다림

오늘은 교회절기상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대강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간 여러분은 예수님이 마음과 삶에 더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셨나요? 아, 대강절이었어, 하신 분이 대부분 아니던가요? 사실 우리 대부분이 기다리는 것은 집문제, 재정문제, 건강문제, 자녀문제 아닙니까! 대강절에 예수님은 안 기다리고 개인적 고민이 해결되기만을 기다렸다니 난 얼마나 세속적인 인간인가! 이런 자괴감을 느끼셨다면 이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그 역시 자기문제해결에만 골몰했던 사람이지만 그 과정에서 그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에게로 향했던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두 가지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자손과 땅을 얻는 것입니다. 그는 첫째,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자손에 대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창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그를 갈대아우르에서 불러내어 약속의땅으로 인도하시면서 약속하시기를,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창 12:2) 내가 너를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고 너를 축복하여 내 이름을 크게 떨치게 하겠다…

75세까지 자녀가 없던 그에게 자녀의 약속은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고대인에게 자녀는 오늘날의 개인적 기쁨이나 가족형성을 넘어 가족의 생존, 가문의 번영, 노동력확보, 재산증식, 미래의 보장 더 나아가 신의 축복과 같은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훨씬 큰 의미를 가졌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가나안땅을 그와 후손에게 영원히 주시겠다고도 약속하셨습니다. 13장에서 롯과 분가한 직후에 받은 약속입니다.

(창 13:14) … ‘너는 네가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라. (창 13:15) 보이는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땅이 거의 유일한 생산수단이던 시절 가나안땅을 영원히 소유케 하시겠다는 약속은 얼마나 흥분되는 일입니까! 땅을 소유함은 더 이상 가나안에서 떠돌이가 아닌 정착민으로서 안정과 안전, 번영을 누릴 기반을 마련한다는 의미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건물주가 되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실제로는 오늘날 집과 토지를 소유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절박하고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에게 이 두 약속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말 오래 기다려야 했습니다. 인내를 요구하는 이 기다림의 시간이 그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2. 아들을 기다리다가 

아들의 약속은 너무나 오랜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5장에 이르러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몇 년이나 지났는지 알  길은 없으나 기다림에 지친 나머지 아들 얻기를 체념하고 가정집사 엘리에셀에게 부족과 재산을 상속할 생각까지 하였습니다.

(창 15:3) ‘주께서 나에게 자식을 주시지 않았으므로 내 집안의 종이 내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믿음을 잃어버린 그에게 하나님은 다시 한번 약속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창 15:4) 그때 여호와께서 ‘그 사람은 네 상속자가 되지 않을 것이며 네 몸에서 태어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 하시고

그리고 그의 믿음을 되살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창 15:5)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고 별을 세어 보아라. 네 후손도 저 별들처럼 많을 것이다’

이 약속이 주는 이미지로 아브라함은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셀수없이 많은 밤하늘의 은하수 별들처럼 번성하는 자손을 상상하는 것은 눈 앞에 있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현실을 이길 넉넉한 힘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거룩한 상상력을 주셨습니다. 아직 현실이 되지 않은, 그러나 현실이 될 수 있는 미래를 지금 앞당겨 마음의 눈으로 보게 해주는 상상력은 인간에게만 주신 놀라운 능력입니다. 예수님도 걱정근심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늘의 새를 보라.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하셔서 그들의 상상력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은 이 약속의 말씀과 하늘의 이미지에 큰 도전을 받고 다시 소망을 품었습니다. 잃었던 믿음을 회복하였음을 6절이 보여줍니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으므로 여호와께서는 이 믿음 때문에 그를 의롭게 여기셨다.

믿음을 잃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주님이 약속을 주시고 그의 잠자던 상상력을 깨워주셔서 다시 믿음을 회복케 하시는 일은 그의 생애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이후 16장에서 다시 믿음을 잃고 사라의 몸종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고 17장에서 99세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약속을 주실 때 어이가 없어 웃기까지 했지만, 하나님은 다시 약속을 상시시켜 믿음을 회복케 하셨습니다. 18장에서 여호와께서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때 이번에는 사라가 속으로 웃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다시 상기시켜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 계속되는 약속의 말씀과 거룩한 상상력의 훈련을 통해, 의심과 믿음의 줄다리기 끝에 마치 비온 뒤 땅이 굳어짐같이 아브라함의 믿음은 점점 더 견고하고 성숙해졌습니다. 견고했다는 말은 점점 덜 흔들리게 되었다는 뜻이고 성숙해졌다는 말은 그의 믿음의 대상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대상이 어떻게 바뀌었나요?

3. 하나님을 발견하다

그는 자신의 소망인 아들을 주실 하나님을 믿었다가 아들도 주실 소망의 근원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의 초점이 선물인 아들에게서 선물을 주시는 이 하나님에게로 옮겨간 것입니다. 이 믿음의 전환, 성장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창 22장의 이삭을 바친 일입니다. 그의 소원이자 소망인 아들 이삭을 드디어 100세 얻었는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여전히 아들이 그의 소망이었다면 그는 이 명령에 순종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이제 신실한 하나님에게로 옮겨졌고 그는 아들을 주실 뿐 아니라 잃으면 다시 살리시기까지 하더라도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아들을 드리려 했습니다. 그의 변화된 믿음을 히브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습니다… (히 11:19)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까지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죽은 사람들 가운에서 이삭을 다시 받은 셈입니다.

죽은 이를 다시 살리시기까지 하더라도 약속을 지키시리라는 이 믿음을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죽음에서 당신의 아들을 다시 살리실 것을 바라보는 믿음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는 생각에 즐거워하다가 마침내 보고 기뻐하였다.’

물론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당신을 향한 믿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즉 오랜 기다림과 실망과 믿음의 시소타기를 통해 그의 믿음을 아들을 바라는 믿음에서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으로,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는 믿음으로 자라갔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그토록 오랜 기간 기다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금방 무언가를 얻으면 우리는 곧 그것과 가치를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오래 기다리노라면 그것의 가치를 더 생각하고 그보다 더 가치있는 무언가를 생각하며 마침내 우리의 시선이 궁극의 가치이신 분을 바라보는 변화를 겪습니다. 이런 일이 아브라함이 땅의 약속을 기다릴 때도 일어났습니다.

4. 땅을 바라보다가 발견한 나라 

자손의 약속과 달리 땅에 대한 약속은 그의 생전에 이루어지지 못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달리 그가 얻은 가나안땅이라고는 그와 아내가 묻힐 장지로 쓸 땅 막벨라굴밖에 없었습니다.

(창 23:20) 이렇게 해서 헷 사람들은 (막벨라의)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아브라함에게 매장지로 양도하였다.

우리로 치면 아브라함은 뉴저지에서 세미터리의 묘지만 몇 기 사고 일생을 집 한 채 없이 렌트인생을 산 셈입니다. 이 땅은 그와 그 자손에게 영원히 주시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약속은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자손을 통해 이루어지리란 믿음을 그는 마침내 가졌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의 땅에 대한 믿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히 11:9) 믿음으로 그는 약속받은 낯선 땅으로 가서 같은 약속을 받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나그네처럼 천막 생활을 하였습니다. (히 11:10) 그것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여 세우신 견고한 하늘의 도성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 11:13) …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잠시 머무는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땅의 약속성취를 기다리다가 그보다 더 견고하고 아름다운 하늘의 도성 곧 하나님나라의 약속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기다리다가 보이지 않는 영원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라본 약속의 성취를 예수님은 이렇게 그와 그처럼 믿음으로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 이렇게 다시 한번 확인해 주셨습니다.

(요 14:1)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요 14:2)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요 14: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해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돌아와 너희를 데리고 가서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5. 이루어진 약속과 이루지   약속

아브라함은 오래 기다린 끝에 자손의 약속실현을 보았고 땅의 약속실현은 보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한 가지 분명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실재였고, 그가 바라보기를 기대하셨던 것이고,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바라보도록 가리키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데서 우리 시선이 더 나아가 보이지 않으나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의와 생명과 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곧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좋은 집을 바라고 기도하고 노력할 때 바람을 이룰 수도 있고 이루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이루기를 바랍니다만 못 이루더라도 낙심할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시선이 그 너머 참되고 영원한 집을 바라보기를 바라십니다. 이를 위해 오래 기다리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기다리고 인내하고 고통을 겪었던 그 시간이 헛되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바라고 기도할 때 소망대로 평온한 가정생활을 누릴 수도, 그렇지 못 하고 배신과 상처와 실망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시선이 참되고 영원한 가족,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리스도를 형님과 오빠로 모신 참된 가족을 바라보도록 인도하십니다. 그 가족이 주는 참되고 영원한 행복은 이 땅에서 누리는 가정의 아무리 큰 행복이라도 찰라처럼 짧은 예고편일 뿐임을 깨닫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질없는 욕망이 거룩한 소망으로 변화되도록 하시는 분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이는 그의 시선이 정결함으로 세례받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나라를 향한 시야가 열리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모든 기다림은 그리스도를 향한 기다림으로 승화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대강절에 어울리게 그리스도를 기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시야에는 하나님의 아들과 그의 나라가 들어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