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1 새로운개혁교회 주일예배 “위로를 기다리다”(누가복음 2:25-38) – 김도완 목사

12월 20, 2025

Series: 주일예배

Book: 누가복음

눅 2:25-33/위로를 기다리다

251221 대강절4주

1. 위로는 어디에 있는가

지난 목요일에 구역일꾼모임 중 한 일꾼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장례식장에 가서는 어떤 위로의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이 문제는 목사로서 많은 장례식장을 찾아다니는 저로서도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흔히 들어 아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합니다. 어두울 명자에, 복 복자를 써서 ‘어두운 사후세계에 가서 염라대왕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부디 좋은 결과를 얻기 바란다’는 암울한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그 좋은 결과란 가장 덜 고통스러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기에 과연 위로인지, 저주인지 헷갈립니다. 불교의 구원은 죽어서 이 지옥의 심판대 앞에 섰다가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굴레 자체를 벗어나 우주와 하나가 되는 상태 곧 해탈인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외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는 식의 표현이 있습니다. 영어로도 비슷한데  I am sorry for your loss나 There are no words for such a loss나 모두 딱히 위로할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나마 위로가 된다면 이런 큰 슬픔을 당신 혼자 겪지 않기를 원하니 나랑 좀 나누십시다, 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고통 중 하나일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슬픔을 위로할 방법이 우리 인간에게는 딱히 없다는 뜻입니다. 진정 세상에는 인생의 온갖 슬픔과 고통을 위로할 길이 없는 것일까요? 그 위로를 우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2. 위로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오늘은 대강절 넷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마리아를, 그 전주에는 아브라함을, 오늘은 예언자 시므온을 살펴 봅니다. 아기 예수님은 부모의 품에 안겨 율법을 따라 정결예식을 행하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 곳에서 시므온이란 노선지자를 만납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위로를 가져다 줄 메시야를 만나기 전까지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아 기다리던 이였습니다.

(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눅 2: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그가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위로란 무엇일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한 위로의 약속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중 한 구절이 이사야의 약속입니다.

(사 52:9)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찌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이사야는 남왕국이 불의와 우상숭배로 인해 쇠락을 거듭하다가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예루살렘이 폐허가 될 것을 예견하고 동시에 언젠가 여호와께서 이 고통과 슬픔의 민족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실 메시야를 보내시리라 소망과 위로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기다리는 위로를 주실 메시야를 시므온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아기 예수님이 바로 그 위로자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3. 위로를 주시는 메시야

그럼 시므온이 기다린 위로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아마도 그는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이 기다렸던 바, 유대왕국의 독립과 번영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될 뿐 아니라 다윗 시대의 빛나는 번영을 회복하는 것이고 이를 가져다 줄 메시야는 당연히 탁월한 정치, 군사적 지도자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위로를 주신 방법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기다린 메시야였던 것은 맞지만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방식으로 위로를 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기다린 것은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들의 바람대로 독립과 번영이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습니까? 그들을 고통과 슬픔에 빠뜨린 찐짜 문제는 로마제국이나 압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압제나 그 앞잡이 헤롯의 착취나 모두 더 큰 문제의 결과요, 증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더 큰 진짜 문제는 로마제국과 헤롯무리 뿐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도 예외없이 탐욕과 허영의 노예로 삼는 죄와 악의 권세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선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거절하고 우상숭배와 불의의 길로 달려가게 만든 것도, 그래서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가 되어 이 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신음하게 만든 것도 모두 그들 안에 있는 죄의 악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고통과 불의의 원인인 죄의 권세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참으로 그들을 해방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죄가 초래한 가장 큰 고통 죽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그들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노한 무리를 이끌고 로마제국을 향해 칼을 들지 않고 사랑과 공의의 십자가를 지고 죄의 권세를 향해 대항해 골고다로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그들을 절망에 빠뜨린 죄의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또한 영광과 능력으로 죽음의 권세를 쓰러뜨리고 무덤문을 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들을 영원히 묶고 있는 죽음의 감옥을 무너뜨리고 문을 열어 해방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죄와 죽음의 권세에 대한 승리를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을 위한 위로를 기다렸지만 메시야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한 위로를 주셨고, 유대인들은 눈앞의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번영이 줄 위로를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영원한 자유와 풍요로운 생명이 주는 참된 위로를 주셨습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4. 진정한 위로를 주시는 메시야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당장의 위로를 기다립니다. 병이 나으면 위로가 되리라, 돈을 좀 더 벌면 위로가 되리라, 자녀의 진학과 취업이 잘 되면 위로가 되리라, 바라던 소원을 이루면 위로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실제로 바람을 이루면 위로가 조금 됩니다. 그러나 그 위로는 유효기간이 너무나 짧습니다. 금방 위로는 사라지고 다시 고통과 슬픔에 사로잡힙니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대부분의 인류가 간절히 바라는 대부분의 소원을 다 이룬 채 살아갑니다. 지구에서 가장 넓은 집에서 건강하게 살며 냉장고에 먹을 것이 쌓여 있고 일할 자리가 있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위로가 필요하다고 여깁니다. 그 바람이 이루어져도 그 위로는 금방 아침안개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왜입니까? 진정한 위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속되는 위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암환자에게 끊임없이 이것, 저것 진통제를 바꿔주어 그 때 그 때 통증만 잊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에 마약성진통제중독과 같은 상태에 이르기도 합니다. 우리 영혼의 허기와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어떤 소원성취도 코끼리에게 비스킷 주듯 진정한 위로를 주지 못 합니다. 빌딩이 빠진 거대한 싱크홀에 삽질해서 메워보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땅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거대한 싱크홀을 메우실 진정한 위로를 주십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묶고 있는 모든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려 참된 해방을 주시고 모든 갈증과 허기를 채울 참된 위로를 주실 때가 오리라고 참된 소망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 마침내 모든 구원받은 백성에게 의와 생명의 삶, 복과 풍요의 삶을 만나게 하시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참된 위로를 받을 것이며, 믿음 안에서 그 위로를 이미 지금 앞당겨 경험할 수 있습니다.

5. 이미 시작된 위로

눅 7장을 보면 나인성의 한 과부가 아들을 잃고 서럽게 웁니다. 지나가시던 예수님은 그녀를 불쌍히 여겨 아들을 살려 그녀의 품에 돌려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표적 즉 예고편입니다. 복음서의 이 기록은 이 땅에서 자녀를 잃은 모든 부모에게 지금 그 자녀를 돌려주리란 약속이 아닙니다. 나인성 과부처럼 잃은 이를 되찾아 다시는 잃지 않을 날이 마침내 모두에게 올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우리를 병과 사고와 죽음과 다툼과 전쟁과 이별로 몰아넣은 근본적 원인이자 이유인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시고 마침내 완전히 멸망시키셔서 그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새 삶을 시작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당연히 그 때에는 잃어버린 자녀를 다시 만날 것이고 빼앗긴 안전과 평안과 풍요와 평화를 되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병과 사고와 죽음과 다툼과 전쟁으로 다시 이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에야 우리는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의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사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그리고 오신 메시야 예수님을 만난 사도 요한이 다가오는 모든 세대에게 선포한 약속입니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럼 그 때까지 우리는 여전히 고통과 슬픔, 결핍과 외로움 가운데 견뎌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그 다가올 참된 생명의 삶을 현재로 당겨서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그 생명의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부터 누리게 하십니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미 시작된 이 하나님나라 안에서 우리는 압도적이고 완전한 위로를 미리 누리기 시작합니다. 이는 마치 약혼한 연인이 아직 부부가 되지 않았지만 이미 마음으로는 그 사랑과 행복을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나 달콤하고 행복한 결혼식과 가정을 기다릴 때 신랑되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는 신부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 이미 충만하게 부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위로가 여러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까? 명작영화의 감동과 재미를 1분짜리 예고편이 다 담을 수 없듯 우리가 누리는 지금의 위로는 당연히 압도적인 새하늘과새땅의 위로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성탄의 계절에 우리에게 오신 아들 예수님을 통해 이 위로를 기어이 주고야 마실 것이 틀림없는 선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이 주는 위로와 같지 않은 위로가 여러분 안에서 시작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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