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8 새로운개혁교회 주일예배 “야생마의 조련자”(시편 42:1-11) – 김도완 목사

12월 27, 2025

Series: 주일예배

Book: 시편

시 42:1-11/야생마의 조련자

251228 주일설교

1. 마음을 어떻게 해요

최근에 한 교우와 상담하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제 마음을 어떻게 못 하겠어요. 걱정하지 않으려는데 자꾸 최악의 상황이 떠올라서 불안해 미치겠어요. 어떻게 하면 좋나요?’ 아마 많은 교우들이 겪는 문제일 겁니다. 이런 생각의 배후에는 ‘마음이란 도저히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처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현대인에게 널리 퍼져있는 신화가 있습니다. 이런 신화를 믿는 이들이 자주 하는 말이 이런 것입니다. ‘화가 나서 미치겠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래서 안 되는 것을 알지만 사랑에 빠진 것을 어떻게 하겠어? 사랑이 죄야?’ ‘나는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사람이야. 이렇게 태어난 걸 어떻게 하라고?’ 그러나 이는 마땅히 마음의 주인이어야 하고 주인일 수 있는 우리가 마음의 종으로 살아가기로 하는 최악의 선택입니다. 마치 야생마를 길들여 원하는 곳으로 타고 가려 하지 않고 고삐에 발목이 묶인 채 야생마가 가고 싶은 황무지로 질질 끌려가는 듯한 모양새입니다. 이는 성경이 지적하는 인간의 불행 즉 죄악의 노예된 상태와 그리 멀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이라 가르치실까요?

2. 마음의 주인

우리 인간은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사명이자 최고의 행복이 무엇이었습니까? 창 1:28을 보십시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땅 즉 세상과 세상 안의 만물을 다스리는 주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인간이 정작 자신의 마음만은 다스리지 않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연히 우리의 마음도 우리가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נָצַר, 나차르).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모든 만물을 다스린다면 당연히 네 마음은 더욱 더 다스려야 한다! 왜? 네 마음이 생명의 샘근원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못 지키면 죽는다는 뜻입니다. ‘지키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나차르는 파수꾼의 행위를 묘사할 때 쓰는데, ‘지켜보다, 돌보다, 관리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파수꾼이 성벽 위에 서서 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동시에 성벽 안의 백성의 안위를 돌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파수꾼처럼 우리 마음의 성벽 위에서 악한 생각과 사상이 침투하지 못 하도록 지키고 선과 평화와 소망과 같은 생명의 백성이 안위를 누리도록 돌보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마음은 우리가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야생마가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길을 들여 사용하는 명마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필요할 때는 짐을 싣게 하고 타고 멀리 가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에 넣어두고 잘 먹이기도 하며 때로 전쟁터에 타고 나가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돌보아 우리가 그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3. 제멋대로 야생마

그럼 왜 이렇게 마음을 통제하기가 어렵습니까? 창세기 3장에 따르면, 인간은 만물의 주인이 되는 영광과 권세를 주신 진짜 주인 하나님의 자리를 노리는 반역을 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만물의 주인자리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이 다스렸던 땅의 통제권을 잃고 그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반역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창 3:18) 땅은 너에게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며…

마음의 통제권 역시 잃고 분노와 시기로 동생을 살해하는 가인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은 인간의 타락이 가져온 종으로의 추락을 잘 보여줍니다.

(창 4:7) … 죄가 너를 다스리려하나(תְּשׁוּקָה 테슈카) 네가 죄를 다스릴지니라(מָשַׁל 마샬).

원래는 우리가 죄된 마음을 마샬 즉 주인이 되어 다스리고 주권을 행사해 금해야 하는데 이제는 죄가 우리를 테슈카, 삼키다, 갈망하다, 맹수가 먹이감을 덮치듯 달려든다, 집어삼키듯 한다는 뜻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마음속 죄성의 노예로 전락하여 더 이상 마음을 다스리지 못 하는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마귀는 아주 성공적으로 이 노예상태를 오히려 자유와 해방이라고 성공적으로 포장하였고 이에 속은 현대인은 마음을 다스리려는 시도를 포기하고야 말았습니다. 그 결과 마음에 떠오르는 욕망의 노예가 되고 온갖 어두운 의지와 감정으로 고통받는 감옥에 갇히고야 말았습니다.

4. 새마음의 창조자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마음을 구원하여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에스겔서는 그 하나님의 계획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겔 36:26)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 정신을 넣어 주며 너희에게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줄 것이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고후 5:17)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존재입니다. 옛 사람은 없어지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로 죽은 이는 제멋대로이던 옛마음이 죽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법에 순종하는 새로운 마음으로 창조됩니다. 이 새마음으로 창조된 이는 이제 마음을 다스리는 주인의 권세를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주권을 회복시키시고 순종하는 새마음을 창조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된 성도의 마음은 그 권세에 순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새로운 질서가 시작됩니다. 이 질서는 건설되기 시작한 하나님나라의 일부입니다. 이렇게 새질서 속에 들어온 한 성도가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보십시오.

5. 마음을 훈련하는 새피조물

오늘 읽은 본문은 밤낮으로 눈물을 멈출 수 없도록 조롱과 고난을 당하는 한 성도입니다. 그의 고통을 들어보십시오.

(시 42:3)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 42: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 (시 42:9) …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

그의 마음은 슬픔과 낙심과 고통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제 멋대로 더 깊은 슬픔의 늪에 빠져들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향해 명령합니다. 5절과 12절에서 거듭 반복합니다.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

그는 마치 자신이 제 3자가 된 듯 낙심하고 불안하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봅니다. 심리학에선 이런 행위를 라벨링이라고 합니다. 이 감정은 슬픔, 이 감정은 불안, 이 감정은 분노… 추상적인 감정을 들여다보고 하나씩 구분해 내어 라벨을 붙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생각, 자극, 상황, 경험을 구분해서 라벨을 붙이는 것이 좋습니다. 무슨 상황이 슬픔을 불러오는가? 어떤 생각이 불안을 자아내는가? 어떤 자극이 분노를 불러일으켰는가? 과연 합당한 불안이며 낙심인가? 이렇게 라벨을 붙여서 종이 위에 감정상태와 원인인 자극을 분류해서 써놓고 차분히 들여다보면, 어느 심리학자는 90%는 일어날 가능성이 낮은 미래의 일이거나 근거가 희박한 감정임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안다고 해서 금방 불안과 낙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평생 야생마처럼 제멋대로이던 마음이 한두 번의 설명과 설득으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라벨링한 감정과 사실을 하나씩 입밖으로 끄집어 내어 마음이 순종할 수 있도록 여러분보다 더 큰 권위, 더 큰 힘으로 명령하여야 합니다. 바로 마음을 창조하신 분의 권위와 능력이 그것입니다. 5절 후반부에서 시인은 명령합니다.

(시 42:5) …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모든 마음의 창조자이자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 분의 권위와 능력이 통제불능의 마음을 순종케 하는 새창조를 행하십니다. 그 결과는 슬픔과 낙심으로 가득한 마음이 오히려 찬송하게 만드는 소망과 기쁨을 얻음입니다.

6. 위대한 마음의 주인

다음으로 이 훈련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야생마를 한 번에 길들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곁의 사랑받는 개는 여러 세대에 걸쳐 길이 든 늑대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늑대같은 마음이 가족같은 반려견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듯 우리의 마음이 주권에 순종하는 과정도 당연히 시간이 걸립니다. 8절을 보면 시인은 낮과 밤에 찬송과 기도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시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진실한 찬송과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훈련합니다. 이 경건훈련을 통해 우리 마음은 생명의 샘물이 터져나와 삶에 평화와 기쁨과 행복의 강을 흐르게 만드는 샘근원이 됩니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마음의 훈련까지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먹고 살기 바쁜데도 시간을 내어 운동합니다. 몇 십년도 안 되는 건강한 노후를 보내려고 말입니다. 조금 더 여유있게 살아보겠다고 은퇴자금을 모으러 죽어라 일합니다. 몇 십년도 안 되는 은퇴생활을 보내려고 말입니다. 부활과 하나님나라를 믿고 하나님과 영원히 삶을 믿는다면 지금의 평안 뿐 아니라 영원한 삶의 충만함을 위해 마음을 훈련하는 것이야말로 더더욱 훈련하지 않아야 한단 말입니까! 사도 바울이 한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딤전 4:8)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이 있으며 이 세상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까지 약속해 줍니다.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은 마음의 훈련의 가장 위대한 예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부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슬픔과 두려움으로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마음과 씨름하고 계셨습니다. 그 마음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세 번이나 간절히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가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막 14:36) 이르시되 “…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당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시키시고 당신의 감정을 성령님의 기쁨으로 채우셔서 온전히 하나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쁨으로 순종하는 마음의 본을 보여주셨고 참된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한 마음의 예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우리 마음이 온전한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으라고 명합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오늘 여러분의 마음은 제멋대로인 야생마입니까, 주인에게 충성하는 명마입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하나님의 명마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