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24 새로운개혁교회 주일예배 “안식과 위로의 정거장”(누가복음 23:42-43) – 김도완 목사

1월 24, 2026

Series: 주일예배

Book: 누가복음

눅 23:42-43/안식과 위로의 정거장

260120 주일설교

1. 죽은 성도들이 머물 

3주 동안 그리스도인의 소망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구원은 죽은 후 육체와 세상을 버리고 영혼으로 저 하늘 어딘가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구원받은 부활의 새몸을 입고 치유받은 새땅에 임한 새하늘 곧 하나님나라를 누리며 이 땅에서 사는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를 위해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희생으로 죄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승천하심으로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셔서 지금도 세상을 치유하고 계시며 모든 구원역사를 마치시면 마침내 재림하셔서 하나님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라 하였습니다.

설교 후 교우들로부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재림의 주님이 하실 심판은 무엇입니까, 지옥은 과연 있으며 어떤 곳입니까, 부활의 몸은 어떤 것입니까, 새하늘과새땅은 어떤 곳입니까? 매주 하나씩 답을 해나갈텐데 오늘은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를 다루겠습니다. 우리 성도는 죽은 후 부활 때까지 어디서 어떤 상태로 있습니까? 믿음 안에서 살다돌아가신 부모님은 어디에 어떻게 계실까요? 이 답을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2. 영혼설과 수면설

성도가 죽은 후 부활의 때까지를 중간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착역이 아니라 정거장이라는 말입니다. 종착역은 당연히 부활하여 맞이할 새하늘과새땅입니다. 이 정거장 곧 중간상태는 어떤 곳입니까?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따르는 비성경적인 두 가지 주장을 살펴봅니다. 먼저 카톨릭의 연옥설입니다. 죽은 이는 천국에 가기 전에 연옥이라는 중간단계의 공간으로 가서 자신의 죗값을 다 치르도록 정화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고전 3:15이 그 대표적 근거구절입니다.

(고전 3: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이는 예수님의 완전한 속죄를 부정하는 주장으로 성경의 핵심가르침과 완전히 배치됩니다. 인간의 죗값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치르셨으며 인간이 고통당함으로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여호와의증인 등 일부 종파가 믿는 영혼수면설입니다. 죽은 후 의식이 사라져서  잠자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되며 부활 때에 새롭게 창조된다는 주장입니다. 전 9:5입니다.

(전 9:5)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이 구절과 죽은 자를 잠들었다고 표현한 여러 구절들을 근거로 합니다만, 이는 잠이라는 표현이 비유임을 이해하지 못 한 결과입니다. 성경에는 이 상태에서 의식이 있다는 묘사가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일단 이 두 가지 주장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바로 부정됩니다.

3. 주와 함께 머무는 낙원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오른쪽에 달린 우편강도에게 이 중간상태를 ‘낙원’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Paradeisos)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영어 paradise의 어원인 헬라어 paradeisos는 고대페르시아어 pairidaeza에서 나왔습니다. ‘담으로 둘러쌓인 왕의 정원’을 의미합니다. 헬라어성경인 70인역에서는 에덴동산을 묘사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낙원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에덴동산처럼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왕의 정원처럼 아름다운 곳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가셨고 우편강도에게 당신과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으니 하늘이 곧 낙원입니다.

우편강도조차도 연옥이 아닌 낙원으로 바로 인도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죄를 정화받는 불같은 고통을 겪는 연옥에 가야한다면 그 누구보다 우편강도가 가야 마땅할 것입니다. 또 의식없이 지내는 곳을 낙원이라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코마상태로 누워있는 것을 행복한다고 여길 이가 있습니까?

요한 사도는 계시록에서 먼저 하늘에 올라간 성도들이 하나님과 함께 머물며 섬긴다고 합니다.

(계 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이 낙원에서 성도는 하나님과 대화 곧 교제하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경험하고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고후 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사도 요한은 낙원에 생명나무가 있다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계 2:7) …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이 비유적 표현은 생명의 힘을 경험한다는 뜻일텐데 잠자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 멉니다.

4. 안식과 위로의 낙원

바울은 왜 몸을 벗고 낙원에 머무는 것을 바랐습니까? 낙원에서 주와 함께 있음으로 인해 누리는 안식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 안식을 잠으로 묘사합니다. 다니엘서입니다.

(단 12: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잠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요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이 잠, 수면의 이미지 때문에 죽은 성도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머문다고 이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이는 오해입니다. 잠이라고 묘사한 이유는 첫째, 산 자가 볼 때 죽은 이는 말이 없기에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이기에 이런 표현을 쓴 것입니다. 둘째, 그 시간이 마치 고단한 육체가 밤의 수면을 통해 쉼을 얻고 활력을 회복하듯 쉼을 얻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입니다.

(계 6:11) ..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때가 되기까지 쉬라고 합니다. 쉼의 상태를 잠이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죽은 이의 운명에 대해 말씀하실 때, 나사로가 위로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눅 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 이제 그(나사로)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부자)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낙원에 있는 성도는 안식과 위로를 얻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이런 안식과 위로 중에 있음을 우리는 믿고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5. 기다림의 낙원

그래서 사도 바울은 거듭 ‘주와 함께 있기 위해’ 이 낙원에 속히 들어가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습니다.

(빌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 낙원이 정말 좋은데, 여기가 천국 아니냐? 여기서 계속 영으로 안식하고 위로를 얻으면 좋은 것 아니야? 이는 정거장 시설에 너무 만족해서 종착역까지 가려는 생각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종착역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생각입니다.

변화산에서 세 제자가 황홀경에 빠진 나머지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막 9: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낙원의 안식과 위로는 죄와 악으로 병든 세상에서 겪은 고단함과 괴로움을 씻게 하고도 남을 만큼 넉넉한 것이지만 여전히 새하늘과새땅에서의 영생의 삶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그 때는 모든 죄악과 불의가 심판받아 사라지고 완전히 치유된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부활의 새몸을 입고 생명과 기쁨 속에서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는 넘치는 생명의 힘으로 더 이상 쉼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충만한 기쁨으로 인해 더 이상 위로가 필요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낙원의 성도는 바로 이 완전한 구원을 기다립니다. 다시 계시록 6장을 봅니다.

(계 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6. 참된 소망의 정거장

참된 믿음 안에서 생을 마친 성도는 주님과 함께 안식과 위로의 낙원 곧 하늘에 머물며 그 하늘이 땅과 하나가 되는 날을 기다립니다. 그 날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이며, 영으로 안식하던 성도가 부활한 새몸을 입는 날입니다. 죄와 악과 사망은 심판받고 의와 선과 생명의 나라가 승리하는 날입니다. 모든 성도는 이 날을 기다립니다. 우리도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영생을 맛보기 시작합니다. 죽어서는 영생이 주는 안식과 위로를 받습니다. 새몸으로 부활함으로 생명과 기쁨의 새생명을 경험합니다. 비유하자면 살아서는 영생의 향기를 맡다가 죽어서는 영생의 에피타이저를 먹고 부활함으로 마침내 영생의 만찬을 제대로 맛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천국의 중간정류장 낙원으로 인해 성도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 쉽게 병들고 부러지고 부패하는 육신으로 인해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 소망으로 인해 모든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하게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