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3:1-6/위로부터 나는 생명
260531 주일설교 믿음1
1. 어떻게 천국에 가는가
최근 한 성경공부에서 어느 교우가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거듭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마 이 질문을 다른 많은 교우들도 품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올 연초부터 13주에 걸쳐 그리스도인의 소망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낙원과 새하늘과새땅으로 대표되는 하나님나라의 소망은 정말 놀라운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런 질문이 뒤따릅니다. 어떻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나는 과연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래서 나오는 질문이, 자신이 거듭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부터는 그리스도의 믿음에 관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믿음도 13주 정도 될 지는 모르겠으나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 출발은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거듭남을 언급한 요한복음 3장을 살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2. 선한 삶으로 충분한가
유명한 오늘 본문은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라 하는 바리새인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을 칭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유대교와 율법에 정통한 그가 볼 때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은 그 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이심의 증거였음에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체면 때문에 사람들 몰래 밤에 찾아와 충청도 사람처럼 에둘러 예수님을 칭찬하는 이 지도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바로 간파하셨습니다. 그것은 신약 곳곳에 등장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갈망과 의문, 곧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무엇인지 이 선지자에게 물어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눅 10장에는 어느 율법학자가, 마 19장에는 한 부자청년관원이 등장해 예수님에게 자신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냐고 묻습니다. 행 2장에서는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이, 16장에서는 빌립보의 간수가 사도들 앞에 엎드려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느냐고 묻습니다. 니고데모 역시 같은 질문을 예수님께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바리새인이었던 그의 마음에는 율법교사나 부자청년관원처럼 율법을 잘 지키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과 함께 과연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하는 의문이 동시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증거는 그들이 이미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서도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다는 것입니다. 율법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긴 다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의 심리는 이 부자청년의 말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마 19:20) ‘저는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 저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율법학자와 청년관원과 니고데모의 공통된 문제점은 율법준수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무언가를 더 해야한다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든 채워야 하는 부족한 무엇이든 인간이 무언가를 해야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이 틀렸음을 바로 잡기 위하여 3절에서 이렇게 답을 하셨습니다.
3. 위로부터 나는 생명
(요 3:3) … ‘내가 분명히 너에게 말하지만 누구든지 다시(ἄνωθεν)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
여기서 다시로 번역된 헬라어 아노덴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위로부터’이고 둘째가 ‘다시’입니다. 관주성경에서 ‘거듭나지’에 붙은 관주를 보면 ‘또는 위에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로 번역할 수 있는데 굳이 ‘다시’로 한 이유는 아마도 4절에서 니고데모가 어떻게 ‘다시’ 나느냐고 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니고데모가 다시 남으로 이해했기에 예수님의 말씀도 다시 남으로 번역한 것인데 사실 예수님은 다시 남이 아니라 위로부터 남의 의미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다시가 아니라 위로부터라는 의미로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요 3장을 제외하면 신약성경전체에서 아노덴이 9번 쓰였는데 갈라디아서 한 곳만 ‘다시’로 번역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위로부터’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심지어 같은 요 3장의 31절에서도 같은 단어 아노덴을 위로부터라고 번역합니다.
(요 3:31) 위로부터(ἄνωθεν)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거듭남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남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거듭남이 완전히 틀린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의도하신 강조점은 하늘로부터 나는 생명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위로부터 혹은 하늘로부터 나는 생명이란 어떤 것입니까? 위와 하늘은 모두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사람의 선함이나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4. 위로부터 난 사람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을 얻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바로 불임부모로부터 태어난 이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육체의 힘으로는 태어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약속과 능력으로 태어났습니다. 이삭은 불임의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100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이삭 부부 역시 불임이었으나 이삭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응답으로 야곱과 에서가 태어났습니다. 야곱의 아내 라헬 역시 불임이었으나 하나님의 긍휼이 여기심으로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습니다. 삼손은 불임인 부모가 천사의 고지를 받은 후 태어났습니다. 불임이었던 한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사무엘을 허락하셨습니다. 신약으로 건너와 사가랴와 엘리사벳도 늙도록 자녀가 없었으나 하나님의 기도응답으로 세례 요한을 낳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남자를 모르는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습니다.
이들의 생명은 모두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로 허락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위로부터 난 생명, 하늘로부터 난 생명은 모두 이처럼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허락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기원도 하나님이며, 방법도 하나님의 것이며 온전히 하나님의 의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자격이 철저히 무력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5. 물과 성령으로 나는 생명
요한복음 3장 전체가 예수님의 음성으로 그 의미를 설명하는데 5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 3:5)… ‘내가 분명히 말해두지만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은 생명을 얻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 구절의 배경이 되는 에스겔 36:25-26을 봅니다. 먼저 25절입니다.
(겔 36: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 모든 더러운 것과 우상에서 너희를 깨끗하게 하겠다.
겔 36장은 죄악으로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을 새로운 백성으로 재창조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첫째가 맑은 물입니다. 이는 유대교에서 부정을 씻는 정결예식에 쓰이는 물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는 세례 시에 쓰이는 물을 의미합니다. 즉 물로 태어남은 죄를 회개할 때 하늘의 생명이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26절입니다.
(겔 36:26)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 정신을 넣어 주며 너희에게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줄 것이며
새마음, 새정신, 순종의 마음을 그 영혼에 넣어주십니다. 누가 넣어주십니까?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신약에서는 성령님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새 마음을 창조하실 때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이 시작됩니다. 요약하면 회개의 세례를 받는 이에게 성령께서 새로운 마음을 창조하심으로 새생명이 시작됩니다. 이 방법은 행 2장에서 오순절에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무리가 우리가 어찌하면 좋으냐고 했을 때 베드로가 한 말에서도 확인됩니다.
(행 2:38)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6. 인간이 할 수 없는 회개
그런데 성령을 주심은 선물 곧 은혜이니 하나님의 일이 맞지만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것은 인간이 하는 일 아닙니까? 그럼 전적인 하나님의 일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이런 오해를 하지 않도록 예수님은 6절에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요 3:6) 육체에서 난 것은 육체이고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여기서 육체는 영과 대비되는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타고난 죄악된 본성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의지와 능력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죄를 깨닫거나 뉘우치거나 그로부터 돌이킬 수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말씀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는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난 것이라야 영이라는 말씀은 회개마저도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여전히 육체의 의지와 능력을 믿고 있던 율법사와 부자관리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물었습니다. 6절이야말로 그 답입니다. ‘네가 무엇을 하여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 네가 믿는 유대인이란 혈통, 율법을 지키는 행위, 선한 삶의 태도 그 모두가 여전히 육에 속한 것이다. 타락한 육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멸망한 육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 영의 생명 곧 영생은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성령님을 의지할 때만 얻을 수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혈통과 행위와 노력을 의지했던 율법사는 회개했다는 말이 안 나오고 부자관원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육에 속한 것을 의지하여 영에 속한 생명을 알지 못 했던 것입니다.
7. 하나님만이 주시는 구원
반면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무리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탄식하였습니다. 16장에 빌립보성 간수는 꿇어 엎드려 사도들에게 간청하기를,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10장에 등장하는 고넬료는 온 가족이 베드로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이들의 고통점은 자신을 의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유대인이란 혈통도, 칭찬듣던 선한 행위도 의지하지 않았고 오히려 철저히 자신들의 무기력함과 자격없음을 인식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감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음으로만 가능하며 그 생명을 주심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와 노력은 철저히 무기력하며 무가치하며 이 생명에 지분이 단 0.0001도 없습니다. 이를 부자청년관원이 떠나간 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막 10:27)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시며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영생의 길의 첫걸음은 이처럼 인간의 철저한 무기력함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의지하고 계십니까? 혹 아직도 여러분 자신의 수고와 희생과 봉사와 헌금과 선행을 의식하며 자랑하지는 않습니까? 바로 거기서 교만과 오만, 불평과 불만이 시작됩니다. 목회하노라면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 수고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나한테 이래? 이런 마음가짐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를 뿐 아니라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와 공동체에 짐이 될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자랑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이라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도 니고데모처럼 어떻게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율법사나 부자관원처럼 스스로를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순절의 무리와 빌립보 간수처럼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가셔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