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21 새로운개혁교회 주일예배 “무가치함과의 싸움”(요한복음 3:16-21) – 김도완 목사

6월 22, 2026

Series: 주일예배

Book: 요한복음

요 3:16-21/무가치함과의 싸움

260621 주일설교 믿음4

1. 무가치함의 고통

최근 한국에 있는 아내의 친구가 보라고 추천해 준 드라마가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동기들의 성공에 시기와 질투, 불안을 겪으며 혼자만 20년째 데뷔를 못 한 무명감독과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은 PD의 이야기라 합니다. 아마 이들이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생각과 싸우는 그의 모습을 통해 위로와 해법을 제시하는 내용이 아닐까 합니다.

자신이 무가치하다, 쓸모없다는 생각은 모든 인간 내면에 자리잡은 불안입니다. 이 불안 때문에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공부하고 돈벌고 성공하려는 이유가 이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런 불안으로 고통받고 있지는 않는지요? 또한 과연 돈, 명예, 지위를 얻으면 이 불안이 해소될까요? 이 불안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되는 길은 무엇일까요?

2.  믿었다고 심판하나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3장 전반부의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 중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성령으로 거듭나 영생을 얻도록 하셨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럼 그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18절은 요한 사도의 음성으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 3: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말씀은 불신앙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의 일부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의문을 품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못된 인간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나? 아무리 착해도 안 믿으면 구원을 못 얻고?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닌가?’ 이에 대해 19-20절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 3:19)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요 3:20)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빛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그 자신이 사실은 어둠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안 믿어서 어둠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어둠에 속해 있기에 안 믿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음은 자신이 어둠에 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선택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이 진리를 초대교회 교부 성 어거스틴은 원죄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죄없이 살다가 죄를 짓는 순간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죄인으로 태어났고 그 결과 죄를 짓는다는 말입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열매로 맺는 순간 갑자기 사과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사과나무였기에 사과 밖에 다른 것은 열매로 맺지 못 합니다. 예수님이 이 원리를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마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안 믿었다고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이미 심판 아래 있는 죄인이었음을 믿지 않음으로 드러냈을  뿐입니다.

3. 죄를  지어도 죄인인가

‘내가 심판 아래 있는 죄인이라고? 내가 살인을 저질렀어? 사기를 쳤어? 왜 죄인이라는 거야?’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나옵니다. 이 의문은 죄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란, 법이나 도덕을 어기는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뜻입니다. 마치 부모에게 가장 큰 불효는 당신이 왜 내 아버지야, 왜 내 어머니야 라는 태도인 것과 같습니다. 선악과사건과 예수님을 믿음여부가 공통되게 보여주는 바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창조주와 구원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사실은 금단의 과일을 먹었거나 규칙을 어긴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자신의 창조주로 더 이상 인정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하기를, ‘그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거야’ 라고 했습니다. 이는 ‘왜 네가 자존심 상하게 하나님 밑에 있어? 네가 하나님이 되면 되잖아’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하게 사는데 믿는다는 말 한 마디 안 하는 게 뭐가 문제야?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구원하러 오셨다고? 왜 내가 구원이 필요하다는 거야? 내가 어디가 부족한 존재라는 거니? 나는 아무 문제 없으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필요하지 않아. 물론 완벽하지 않지만 내가 열심히, 선하게 살아서 갚으면 되잖아. 하나님의 아들에게 고개 숙일 필요 없다고…’ 즉 하나님의 사랑도, 긍휼도 필요없다는 태도가 곧 가장 큰 죄입니다. 이를 교만이라고 하고 C.S.루이스는 살인이나 간음보다 더 큰 진짜 죄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는 자신이 하나님이 된 듯 여기는 태도, 하나님의 아들에게조차 고개 숙이지 않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육체와 상관없이 순수하게 자아가 짓는 가장 큰 죄입니다.

‘좋아, 내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 치자. 그래도 저기 살인자, 사기꾼, 불륜을 저지르는 이와는 다르잖아. 그런데 같은 죄인 취급을 받는 것은 부당하지 않아?’ 여전히 이런 반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아도 죄인’이라는 말은 흉악한 죄인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환경과 기회와 시간과 정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환경과 기회의 차이란 말은 우리가 흉악한 죄를 짓지 않은 이유는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좋은 일자리를 얻을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라는 의미이고, 만약 불우한 환경에서 차별과 편견 아래 자라고 좋은 일자리를 얻지 못 했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그런 짓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시간과 정도의 차이라는 말은 100만 불을 사기친 사기꾼과 우리의 차이는 액수의 차이일 뿐이며 더 많은 시간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더 큰 부정직한 행위를 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마 5:21) ‘살인하지 말아라’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마 5:22) 그러나 … 형제에게 화내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바보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7) ‘간음하지 말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마 5:28) 그러나 …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중 살인자 아닌 자가 어디 있으며 부정하지 않은 자가 누구이며 도둑놈, 사기꾼 아닌 자는 또 누구입니까!

4. 무가치함으로부터의 구원

이렇게 항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목사님은 우리를 이렇게 죄인으로 몰아야 속이 시원합니까? 그렇잖아도 내가 무가치한 인간인 것 같아 불안하고 힘든데 살인자나 다름없다니, 하나님은 정말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게 못마땅하신 분인가요?’ 이 역시 기독교에 대해 가지는 오해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행복한 것을 못 견디셔서 엄격한 율법을 요구하시고 죄인이라고 쉴 새 없이 비난하시는 분이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무지에서 오는 심각한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진심을 17절에서 보십시오.

(요 3:17)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이 아닌 구원을, 정죄가 아닌 용서를, 진노가 아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절망적 현실을 얄팍한 위로로 덮고 넘어가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 참된 은혜의 손길을 내밀어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세상은 거짓된 위로로 우리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처럼 속입니다. ‘네가 돈을 많이 벌어봐, 그럼 넌 가치있는 존재로 대접받을 거야. 학력과 지위와 인기와 명성을 쌓아 봐. 너는 세상에 유익한 존재가 되는 거야. 그러면 너의 불안함과 두려움도 모두 해결된다니까.’ 그러나 그렇게 얻은 위로는 불안을 해결해 준 돈과 성공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는 또 다른 불안 속으로 우리를 밀어넣습니다. 그런 위로는 불안의 진짜 원인인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조금도 해결하지 못 합니다. 불안과 교만이 뒤섞인 영혼은 세상을 얼마나 파괴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구원하는 참된 은혜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듣기 좋은 위로의 말이나 진통제를 주는 해결책이 아니라 모든 고통의 원인인 죄를 완전히 해결하는 대수술을 하십니다. 그것은 유일하신 당신의 아들을 우리 죄값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16절입니다.

(요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십자가 선언만큼 우리를 가치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는 사건은 없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선언하심으로 우리를 피조세계에서 가장 가치있는 존재로 높여주셨습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다고 선언하심으로 우리가 온우주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선포하셨습니다. 무언가의 가치는 그것을 얻기 위해 얼마를 지불했느냐로 측정됩니다. 반지를 사는데 얼마를 줬느냐고 물었는데 10불을 줬다면 ‘아, 큐빅이구나’라고 할 것입니다. 만 불을 줬다면 ‘다이아몬드네.’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무엇을 대가로 줬느냐고 물었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값주고 보배로운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흘렸다고 한다면 온 우주가 우리를 보고 놀랄 것입니다. ‘도대체 너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단 말이냐!’ 여러분은 무엇을 얻기 위해 여러분의 사랑하는 아들, 딸의 생명을 희생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신 하나님은 도대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희생하신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받은 사랑이요, 이것이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예수님이 그 아들 구원주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죄악으로 무가치한 죄인이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 구원받았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형언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로 하나님은 이 믿음으로 겸손히 무릎 꿇는 이들에게 성령으로 거듭나 하늘의 생명으로 살아가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의 이름을 영원히, 영원히 찬양하는 성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이 놀라운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