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53:7-9/침묵하신 메시야
260802 주일설교
1-1. 하나님의 침묵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엔도 슈사꾸의 소설 ‘침묵’은 참으로 어려운 주제를 다룹니다. 17세기의 일본 에도 막부의 기독교대탄압시기에 일본에 건너온 포르투칼 선교사 로드리고 신부는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배교를 할 것인가,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신자들이 죽어가게 내버려둘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이 혹독한 박해를 당하는 자녀들을 보고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 하여 괴로워하던 그는 동시에 자신의 침묵이 신자들을 더 많이 순교하게 만든다는 역설에 당황합니다.
1-2
그 때 신자들을 사랑했기에 배교의 길을 택했던 스승 페레이라 신부를 만난 그는 마음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깨달음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순교자들을 외면하심이 아니요, 오히려 그들의 아픔과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그들을 진정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깨달음이 그것입니다. 소설의 제목처럼 침묵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말함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역설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침묵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은 이처럼 쉽지 않지만 도전하지 않기에는 너무나 깊고 풍성한 진리가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침묵이 주는 메시지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2-1. 왜 침묵하셨는가
이사야서 53장을 3주째 묵상하고 있습니다. 지난 2주 동안 멸시당하신 메시야와 질고를 지신 메시야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침묵하신 메시야에 대해 묵상하겠습니다. 7절입니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면서도 침묵을 지켰으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
예수님이 침묵을 지키신 장면이 실제 복음서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먼저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으시면서 침묵하셨습니다.
(막 14:60) 이때 대제사장이 일어나 예수님께 ‘이들이 네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도 왜 대답이 없는가?’ 하고 물었다. (막 14:61) 그래도 예수님이 침묵을 지키시고 대답을 하시지 않자 …
빌라도총독 앞에서 고소를 당하시면서도 침묵하셨습니다.
(마 27: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고소하는 말에는 일체 대답하지 않으셨다. (마 27:13) 그때 빌라도가 예수님께 ‘저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증언하는 말이 들리지 않느냐?’ 하고 물어도 (마 27:14) 예수님이 전혀 대답하지 않으시자 그는 아주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2-2
예수님은 무지한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반박하거나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막 15장입니다.
(막 15:29) 지나가던 사람들도 머리를 흔들며 ‘야! 성전을 헐고 3일만에 짓겠다는 자야. (막 15:30) 네 자신이나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너라.’ 하고 조롱하였다. (막 15:31)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도 그와 같이 예수님을 조롱하며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군. (막 15:32) 이봐,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야,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그러면 우리도 믿겠다.’ 하였고 함께 못박힌 강도들까지도 예수님을 욕하였다.
그럼 예수님은 왜 이런 무지한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침묵하셨습니까? 그들의 억지와 거짓말을 낱낱이 고발하고 저주와 심판을 선고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런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굴복이나 동조가 아닙니가?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한다면 속이 터져서 침묵할 수 있었을까요?
- 온전한순종을 위해서
그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순종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이 53장을 포함하여 이사야서를 10차례 이상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이 말씀을 잘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즉 메시야를 묘사하는 이 예언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 당신이 이 모든 고난을 침묵으로 대응키로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인데 예수님은 어떻게 당신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침묵을 택하실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은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 있습니다. 그 기도에서 주님은 당신이 원하는 바를 모두 아버지께 털어놓았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난의 잔을 마시지 않고 지나가게 해주세요! 그 기도에서 주님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시기를 구했던 당신의 겸손한 믿음으로 고난을 피하고만 싶은 당신의 뜻을 굴복하였습니다. 그랬기에 다음 날 실제로 닥친 고난 앞에서도 분노나 원망이나 두려움이 아닌 인내와 믿음과 사랑으로 순종의 길을 가실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순종의 기적을 일으키는 비밀입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은 굳은 의지가 아닙니다. 겸손한 믿음의 기도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우리가 원하는 소원리스트를 이루도록 하나님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도무지 굴복할 줄 모르는 우리의 고집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오른뺨을 맞고 왼뺨을 내밀고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며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릅니까? 불가능하지 않나요? 네, 우리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느니라! 겟세마네 동산으로 달려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이에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히 5:8)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몸소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서 (히 5:9) 완전하게 되셨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예수님처럼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움으로 완전하게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하나님을믿으셨기에
고난을 침묵으로 대응하셨던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의 거짓비난과 빌라도와 헤롯의 무례함, 군종과 병사들의 조롱과 고문을 당하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로 결정하셨으니 마치 호수와 같이 평온하셔서 아무런 동요가 없었을까요? 그렇다면 왜 십자가상에서 부르짖기를,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했겠습니까! 여러분, 소송장을 받고 법정과 경찰서를 왔다갔다 해 보십시오. 흔한 말로 피가 마릅니다. 하물며 불법적인 체포와 재판을 당하시며 악한 거짓 증인들로부터 당신이 목숨을 바쳐 순종하는 아버지 하나님을 모욕하는 죄인이라는 비방을 눈 앞에서 들으실 때,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 찬 헤롯과 빌라도로부터 뭔가 신기한 것을 좀 보여달라는 소리와 놓아줄테니 변명을 해보라는 무례하고 오만한 말을 들으실 때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하셨을까요! 그런데도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모든 불의를 바로 잡으시고 당신의 의로우심을 온 천하에 선포하실 의로우신 재판장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신뢰에 대해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벧전 2: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예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품고 계셨습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의 침묵은 불의에 대한 굴복이나 동조가 아닙니다. 오히려 공의의 승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예수님을 무덤에서 일으키심으로 의의 승리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온 세상 불의를 심판하시는 날 완전한 의의 승리를 확정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침묵이 오늘날 성도에게 던지는 도전은 오히려 불의 앞에 굴복하거나 침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 앞에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믿고 의의 길 가기를 멈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마침내 완전한 의의 승리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신뢰하고 불의 앞에서도 의의 길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 죄인을사랑하셨기에
예수님이 고난을 침묵으로 대응하신 세 번째 이유는 죄인을 긍휼이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주님께서 당신을 죽이려 드는 악인들에게 왜 저주와 심판의 선고를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칼을 휘두르는 베드로에게 당신이 한 군단의 천사를 불러 악인들을 쓸어버릴 권세가 있음을 상기시켜 주신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셨듯 이 예루살렘을 왜 초토화시켜 버리지 않으셨던 것입니까? 이는 그들의 죄악이 무지에서 나온 것임을 아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당신이 그들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이 고난을 당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계속해서 인간의 무지를 고발합니다.
(사 53:4) …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사 53:6) 우리는 다 길 잃은 양처럼 제각기 잘못된 길로 갔으나 … (사 53:8) … 그 세대 사람들 중에 그가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 자기들의 죄 때문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이들의 무지가 바로 우리의 무지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죄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인 줄 깨닫지 못 하고 자신이 의로운 줄로, 경건한 줄로, 양심적인 줄로 착각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외면하고 형제, 자매를 멸시하며 불순종의 죄를 짓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눅 23:34) …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
이 무지한 이들을 위해 주님은 저주와 심판 대신 침묵과 고난당함을 택하셨습니다. 우리의 죄값을 당신이 모두 치르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베드로 사도의 선언입니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주님의 말없는 고난당하심은 우리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외침보다 크게 울려퍼지는 사랑의 선언이었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고침을 받았고 그 긍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으며 그 자비로 우리는 영원히 구원받았습니다.
주님은 온전한 순종을 위해 침묵하시고 아버지를 신뢰하셨기에 침묵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또 침묵하셨습니다. 주님의 침묵에서 우리는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의 음성을 듣습니다. 여러분 귀에도 이 사랑의 음성이 들리시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