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언을믿을 수 있는가
여러분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사실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이를 믿는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믿음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지혜롭다는 이들이 이 사실을 믿기 어려워 합니다. 성경의 초월성을 믿지 못 하는 이들은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사실도 받아들이기 어려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예언이 사실은 그 예언의 내용이 일어난 후에 첨가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던 본문 중 하나가 오늘 읽은 이사야서 53장입니다.
이사야서는 기원전 8세기경 곧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7백 여년 전에 기록된 책입니다. 18세기와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이 발전하면서 이사야서 53장은 교회가 탄생한 후인 기독교 시대에 수정되거나 첨가되었을 것이라는 추정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이 묘사하는 고난당하는 메시야의 모습이 예수님과 너무나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초월성을 부정하는 이들이 볼 때 후대에 수정하거나 첨가한 것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예언과 예수님의 모습이 일치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 의심을 완전히 무너뜨린 발견이 1940년대에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의 사해 근처 동굴에서 발견된 소위 사해사본에는 이사야서를 포함한 거의 모든 구약성경의 사본이 발견되었는데 탄소연대측정과 유물간 비교, 고문서학 등의 방법을 사용해 보니 모두가 이 사본의 기록연대가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 사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약 150여 년 전에 이미 존재했던 문서에 이사야서 53장이 현재 우리가 읽는 본문 그대로 기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즉 이 장의 예언은 예수님의 고난 후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미 기록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 신약시대의증거
이 사실은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시기에 유대인들이 읽던 이사야서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을 기록하면서 이 장의 4절을 인용합니다.
(마 8:17)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의 다음과 같은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담당하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행 8장은 이디오피아의 관리가 읽던 7-8절을 인용합니다.
(행 8:32) 그가 읽던 성경 귀절은 이것이었다. ‘그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끌려갔고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처럼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 (행 8:33) 그가 굴욕을 당하고 억울한 판결을 받아 세상에서 그의 생명을 빼앗겼으니 누가 그 세대의 악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행 8:34) 그 고관이 빌립에게 ‘이 말은 이사야 자신을 두고 한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사도 역시 베드로전서에서 5-6절을 인용합니다.
(벧전 2:24) …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 입으심으로 여러분이 낫게 된 것입니다. (벧전 2:25) 여러분이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방황하였으나 지금은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와 감독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돌아왔습니다.
이 구절들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저자들이 읽던 이사야서 53장에 이미 고난받는 메시야에 대한 기록이 오늘날 우리가 읽는 본문과 똑같이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 멸시받는출신의 메시야
그럼 이 장의 예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예고하고 있으며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은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신비를 이해하고 복음을 깨닫는데 큰 유익을 주리라 믿기에 오늘부터 몇 주가 이 장의 예언을 차례로 묵상하겠습니다.
이 장 1절은 메시야에 대한 믿기 힘든 모습을 소개하며 시작합니다. 이는 바로 멸시받는 메시야입니다.
(사 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여호와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는가?
이사야는 자신이 전하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사람들이 믿지 않으리라고 탄식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전하는 메시야 즉 여호와의 능력이 나타난 메시야의 모습이 뜻밖에도 사람들의 기대와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였습니다. 이사야 당시에는 앗수르 등 주변제국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할 지도자,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을 가져다 줄 강력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오실 메시야는 그들의 기대와 너무나 달랐습니다. 2절입니다.
(사 53:2) 그는 연한 순처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주 앞에서 자랐으니 그에게는 풍채나 위엄이 없고 우리의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도 없다.
그는 연약하고 초라하고 매력적이지도 않습니다. 실제 예수님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출생부터 왕족이나 귀족집안이 아닌 당시 가장 하층민인 목수의 집안이어서 고향사람들에게조차 배척당하셨습니다.
(마 13:54) 고향으로 가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사람들이 듣고 놀라 ‘… (마 13:55)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 하면서 (마 13:57) 예수님을 배척하였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도 아버지를 도와 목수생활을 하셨고 이 역시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막 6:3) ‘저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이며 …’ 그리고서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다.
또한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 아닌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당신의 출생에 대해 아버지 없이 태어난 자식이라는 멸시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출신지역 갈릴리와 나사렛 역시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요 7:52) 바리새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요 1: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예수님은 출신지역, 직업, 집안, 출생에서부터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흙수저 중 흙수저였습니다.
- 초라한모습의 메시야
거기에다가 예수님의 외모 또한 평범했거나 보잘 것 없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군인들은 유다가 알려주기 전까지 누가 이들의 지도자 예수인지 알아보지 못 했습니다.
(마 26:48) 유다는 ‘내가 예수에게 입을 맞출 테니 그를 붙잡으시오.’ 하고 그들과 미리 암호를 짜 둔 후
바리새인들은 30대 초반인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무척 나이든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요 8:57) 이때 유대인들이 ‘당신은 아직 50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하고 묻자
이는 예수님이 어릴 때부터 아버지 요셉을 따라 뙤약볕 아래서 쉴새없이 노동해야 했던 가난한 목수의 삶과 고단한 사역의 길에서 수시로 굶고 험한 잠자리를 견디느라 실제보다 더 나이든 모습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봅니다. 성화에 그려진 키크고 잘 생기고 잘 정돈된 머리에 멋있게 옷입은 백인 예수님은 서구인들의 편견과 신앙심이 반영된 모습이지, 실제 예수님의 모습과는 분명 거리가 멉니다.
- 낮은곳의 하나님
이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지 모릅니다. 고대의 모든 신은 강자의 신이었습니다. 왕은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고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제사장 계급은 자신들이 독점한 지식을 신의 뜻으로 포장했으며 귀족들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신에게 충성한 대가로 부여받은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백성은 자신들의 당하는 착취와 억압을 신의 뜻으로 여기며 그 질서에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지배계층이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부와 권력이나 비천함과 가난은 모두 신이 준 운명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현대에까지 능력주의 세계관으로 이어집니다. 부와 성공은 오롯이 개인의 성실과 경건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는 믿음입니다. 이 고대의 운명론과 현대의 능력주의의 징검다리를 놓은 세계관이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입니다. 이 책은 자본주의 발전에 큰 긍정적 영향을 끼쳤지만 동시에 성공과 부가 곧 하나님의 축복이며 실패와 가난이 하나님의 저주라는 그릇된 인식을 만드는 부작용도 낳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고대의 운명론이 현대의 능력주의로 옷을 갈아입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 결과 고대에 귀족으로 출생한 것이 신의 선택을 받은 증거였다면 현대에는 성공한 것이 재능과 노력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결함이 있는 출생, 보잘 것 없는 출신, 재능없는 삶, 가난과 실패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멸시받는 메시야는 반대로 참 하나님이 강자의 편이 아니며 오히려 가장 약자의 편이심을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아픔과 슬픔과 상처와 비참함을 겪는 이들의 곁에 계시며 그들을 누구보다 이해하시는 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 멸시받는자의 하나님
구약은 시종일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가르쳐 줍니다.
(시 68:5)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예수님은 당신을 누구와 동일시 하셨습니까?
(마 25:40) (심판하는)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 하나님이 온갖 우상들과 달리 약자의 하나님이시며 세상의 주장과 달리 실패자의 곁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심을 당신이 가장 멸시받는 모습으로 오심을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3절입니다.
(사 53: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고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그를 외면하고 우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늘 멸시와 차별로 서러운 분이 계시다면 주님이 이미 더한 멸시를 견디셨으며 그 비통함을 이해하시며 우리 곁에서 그 서러움을 같이 견뎌 주시는 분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주님처럼 멸시받는 이들의 곁으로 내려가 그들의 눈물을 닦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멸시받는 우리가 존귀하게 되도록 당신이 십자가에서 가장 큰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당신이 당한 멸시로 인해 우리는 존중받게 되었으며 당신이 당한 천대로 인해 우리는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멸시와 천대를 당하는 십자가로까지 기꺼이 내려가신 우리 주님을 영원히 찬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