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23 “부끄러움이 없는 삶”(롬 3:23-26) – 김도완 목사

9월 14, 2026

Series: 주일예배

Book: 로마서

롬 3:23-26/부끄러움이 없는 삶

260823 주일설교 믿음12

1. 죄에 대한 혼란

2013년 6월에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16세의 소년 이든 코우치는 면허취소수준의 3배가 넘는 혈중알콜농도의 만취상태로 픽업트럭을 몰다가 사고를 일으켜 4명을 현장에서 사망케 하고 동승자 등 여러 명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검찰은 그에게 20년 형을 구형했으나 변호사는 그가 부유한 사업가 부모 아래에서 과보호 아래 자라느라 도덕성을 배우지 못 하는 부자병증후군을 앓고 있었기에 처벌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판사는 변호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실형을 선고하지 않고 재활치료원의 수강과 10년의 보호관찰만을 명했습니다. 그 후 그는 보호관찰기간에 다시 음주파티를 벌여 결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현대사회가 직면한 죄에 대한 혼란을 보여줍니다. 음주운전으로 4명의 생명을 앗아간 행위가 처벌받을 죄가 아니라 병이며 증후군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죄일까요? 현대인들은 죄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 과거에 죄라고 부르던 행위를 실수, 트라우마 혹은 증후군 등의 용어로 바꾸어 부릅니다. 죄책감은 극복해야 할 불안감이나 자존감 저하 혹은 자기학대 등으로 치부합니다. 죄를 죄라고 부르지 않고 죄책감을 죄책감으로 인정하지 않는 현대를 죄가 실종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이 죄에 대해 말하기 싫어하는데도 굳이 성경은 이 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도대체 죄란 무엇일까요? 왜 성경은 듣기 불편한 죄를 강조합니까?

2. 죄란 무엇인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죄는 법을 어기는 위법행위입니다. 형법, 민법 등을 어기면 범죄로 규정하고 처벌을 받지요. 혹은 종교적으로 율법을 어기는 행위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죄의 개념은 불완전합니다. 큰 고통과 피해를 이웃에게 주면서도 법으로 규정되지 않은 행위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기꾼들은 법망의 사각지대를 교묘하게 찾아내어 악한 일을 저지릅니다. 또 법체계가 없는 오지에 사는 이들의 행위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마음에서 벌어지는 온갖 악한 일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보다 더 폭넓은 개념으로 양심을 거스르는 행위를 들 수 있습니다. 이 개념은 법으로 규정되지 않은 행위의 옳고 그름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도 여전히 사각지대가 너무 많이 생깁니다. 모든 이의 양심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선한 천성을 타고 났거나 엄격한 도덕교육을 받은 이와 반대로 싸이코패스나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 한 이들의 기준이 당연히 크게 다를 겁니다. 이 경우 죄의 기준이 시대와 지역, 선호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겁니다.

성경은 이보다 더 본질적인 의미의 죄가 있다고 선언합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ἥμαρτον)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표준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먼저 죄는 일부 악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 곧 인류의 공통된 문제입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선언이 마땅치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교양있고 착하게 살았는데 왜 나를 죄인이라는 거야? 자부심이 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는 죄를 위법행위나 비양심적행위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왜 죄가 모든 사람의 문제입니까? 이 구절에서 죄라고 번역된 헬라어 헤마르톤(ἥμαρτον)의 뜻은 화살이 과녁을 빗나간 상태를 가리킵니다. 화살을 쏘는 이유는 과녁을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고대인들이 화살을 쏘는 이유는 사냥감을 잡기 위해서이거나 자신을 공격해오는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화살이 빗나가 사냥감이 도망가 버리거나 달려오던 곰이나 늑대를 맞추어 물리치지 못 했다면 그 화살은 헛되이 낭비된 것입니다. 그 결과는 굶거나 혹은 굶주린 곰의 먹이가 되는 비극입니다.

화살을 낭비한 것처럼 인생이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 한 상태를 헛되이 낭비한 것이요, 이를 곧 성경은 죄라고 봅니다. 그럼 어떤 행위가 낭비입니까? 언듯 열심히 일하지 않고 게으르게 사는 것을 떠올리겠습니다만, 부지런히 살아도 여전히 낭비하는 인생일 수 있습니다. 도둑이나 사기꾼이 성실하고 부지런하였다고 옳은 삶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럼 인생이 화살처럼 날아가 맞추어야 하는 과녁 곧 목적이란 무엇입니까?

3. 인생의 과녁

인생의 과녁 곧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사야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 43:7) 그들은 다 내 백성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자들이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을 위한 도구란 말인가? 비인간화시키는 것 아닌가? 이런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만,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인간이 참된 인간됨을 발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의미를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서는 이렇게 부연설명합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소유리문답 제1문)’

하나님을 높이는 것과 그 분과 함께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를 비유하면 사랑하는 이가 잘 될 때 누리는 행복이야말로 인간의 삶의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남편이 성공할 때 아내는 행복합니다. 아내가 자신의 꿈을 찾을 때 남편도 행복합니다. 자녀가 재능을 발휘해 인정받을 때 부모는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높임을 받을 누리는 행복은 자신이 높아질 때 누리는 행복보다 더 큽니다. 온갖 역경을 딛고 꿈을 이룬 이를 보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타인을 위해 역경을 견디는 이를 보고는 존경심을 넘어 경외심을 느끼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창조의 목적을 이루며 살 때 진정한 행복을 느끼며 이는 자신의 꿈을 이룰 때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 본래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디자인되었습니다. 그럴 때 더 큰 복지와 행복을 누립니다.

부부가 서로를 행복하게 만들기를 원할 때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그 때 두 사람은 더욱 큰 행복과 진정한 연합을 경험합니다. 부부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를 원할 때 거기에는 참사랑이나 연합이 없고 불만과 불행만 남습니다.

4. 과녁을 벗어난 인생

창세기는 창조주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창조된 인간이 창조주 대신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려 그 자신을 창조주의 자리에 올려 놓으려 할 때 죄가 시작되었다고 고발합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한 말이 이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되리라! 이 거짓에 속아넘어간 아담과 하와는 자신을 높이면 더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였더니 그 결과는 사랑과 연합의 상실이며 불행이요, 멸망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마귀에게 속아 자신을 더 위해야 더 행복해지는 줄 압니다. 로마서 1장이 이렇게 고발합니다.

(롬 1:21)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나님으로서 영광스럽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으며 그들의 생각은 쓸모없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어두워졌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죄요, 가장 근본적인 죄입니다. 창조주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목적을 벗어나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려는 삶 자체가 과녁을 벗어난 날아가는 화살처럼 과녁을 벗어난 인생입니다. 이런 삶은 이 세상에 가득한 악을 만들어내는 가해자인 동시에 그 악의 피해자입니다. 우리는 우리 죄가 만든 고통으로 인해 이 피조세계와 더불어 고통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몇몇 흉악한 범죄자들만의 운명이 아닙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함께 짋어지고 가는 운명의 굴레입니다. 이 운명을 깨닫는 것이 구원의 첫걸음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를 깨달을 수 있을까요?

5. 죄를 깨닫는 은혜 

이를 깨닫는다는 말은 지식을 가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깨달음으로 인해 삶의 방향을 바뀌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단을 불러오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종류의 깨달음은 사람의 지성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요 16:8) 성령님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을 깨우쳐 주실 것이다. (요 16:9) 죄에 대하여라고 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며

우리가 아는 수준의 죄를 넘어서서 창조의 목적을 벗어나 달려가는 멸망의 상태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깨닫고 결단하는 일은 성령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경험한 사람들은 갑자기 자신의 모든 행위가 얼마나 철저하게 죄와 악에 물들어 있었는지를 깨닫고 진실하게 회개하는 경험을 합니다.

이 경험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는데까지 이어집니다. 캄캄한 밤일수록 밤하늘의 별이 더 밝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반면 네온사인이 어지럽게 빛나면 정작 별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성을 철저히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와 깊이를 더 깊이 깨닫습니다. 반면 자신에 대한 희망이 남아있을수록 희미한 네온사인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가려서 보지 못 하게 만듭니다.

6. 예수님을 발견하는 은혜

성령님은 당신의 자녀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의지하도록 만드십니다. 우리의 닫힌 눈을 열어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경험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의 젊은 지도자로서 자기확신과 신앙의 열정, 자부심을 가지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성령님이 오셔서 그의 눈을 열어 부활의 주 예수님을 보게 해 주시자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얼마나 악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성령님은 3일간 그로 하여금 철저히 회개하게 만드렸습니다. 그의 눈을 덮고 있던 오만과 무지의 비늘이 3일 만에 벗겨지자 그는 완전히 돌이켜 교회를 박해하던 박해자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실 때 우리의 죄와 더불어 발견하게 되는 진리가 하나님이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입니다. 24절입니다.

(롬 3:24)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길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23절에서 인류의 죄성에 대해 선언하고 24절에서 예수님의 구원의 길에 대해 선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죄를 깨달아야 이 은혜도 깨닫기 때문입니다. 죄를 깨닫지 못 하면 이 은혜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눈은 사도 바울처럼 비늘이 떨어져 죄와 은혜를 보고 계십니까? 성령님이 여러분 모두의 눈을 열어주셔서 진리를 보게 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