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30 “앎과 함”(눅 16:19-26) – 김도완 목사

9월 14, 2026

Series: 주일예배

Book: 마가복음

눅 16:19-26/앎과 함

260830 주일설교 믿음13

1. 죄인들과 바리새인들

기독교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부자와나사로의 비유 중 전반부만 읽었습니다. 후반부는 다음 주에 살펴보겠습니다. 이 비유는 눅 15-16장에 이르는 다섯 개의 비유모음 중 마지막의 것입니다. 이 비유를 들려주신 상황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세리와 죄인들을 당신이 영접하시자 이를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비난을 가한 장면입니다. 그들의 비난에 대응하여 예수님은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의 비유 그리고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차례로 들려주신 후 마지막으로 이 부자와나사로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배경 하에서 비유를 이해해야 합니다. 즉 거지 나사로는 당신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세리와 죄인들은 상징한다면 부자는 그들을 멸시하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상징합니다. 이 구도를 가지고 비유를 들여다 보십시다.

2. 구원과 심판의 갈림길

먼저 이 비유는 성경전체를 통틀어 가장 생생한 사후세계에 대한 묘사를 보여줍니다. 거지 나사로가 간 곳은 천사에게 받들려 들어간 아브라함의 품이라 하고, 부자가 간 곳은 음부 혹은 지옥으로 번역된 하데스입니다. 편의상 이 곳을 천국과 지옥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메시지는 사후세계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운명에 놓인 이유입니다.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갈림길은 무엇일까요? 명시적이지는 않으나 문맥에 숨어있는 그 답을 잘 찾아보면 믿음과 구원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비유가 예수님의 많은 다른 비유와 다른 독특한 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제시된다는 것입니다. 거지의 이름은 나사로 곧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듯의 헬라어입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비유 중 등장인물의 이름이 제시되는 곳은 오직 이 이야기 하나 뿐입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이 거지의 이름을 알고 계셨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과 거지가 서로 아는 사이 곧 친밀한 사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반면 다른 등장인물은 일반명사인 부자라고만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를 모르신다, 아무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이 구원에 중요합니까? 네, 아주 중요합니다. 믿음이란 주님을 아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3. 양을 아는 목자

예수님이 그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요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여기서 네 번이나 반복된, 알다로 번역된 헬라어 기노스코는 우리가 영화배우 이름을 알듯이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를 넘어서 부부나 부모와 자녀처럼 아주 친밀한 관계의 앎을 의미합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맺고 계신 완전한 연합처럼, 예수님과 성도도 이렇게 친밀하게 알고 있으며, 그 관계야말로 예수님이 양을 위하여 죽으시는 이유에 다름 아니라는 말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역시 속속들이 아십니다. 시 139편입니다.

(시 139: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시 139: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시 139: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주님이 여러분을 아심은 마치 엄마가 진통 끝에 품에 안은 아기를 기저귀 갈며 우유 먹여 장성할 때까지 세밀하게 돌본 자식을 다 앎과 같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믿기 어려운 사랑과 능력의 창조주께서 이토록 깊이 우리를 아신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든든하고 위로가 됩니까! 이제 문제는 우리가 그 분을 아느냐 입니다.

4. 목자를 아는 

주님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 그 분에 대한 정보,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까? 비기독교인 종교학자가 아마 대부분의 여러분보다 예수님에 관한 정보를 훨씬 많이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분에 대해 아주 친밀한 감정적 경험이나 영적 체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까요? 이단 중에도 여러분보다 훨씬 많은 느낌이나 체험을 가진 이들이 있을 겁니다. 주님을 앎은 지식과 감정, 체험을 포함하나 그 이상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설명입니다.

(요일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일 2: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주님을 모르면서 안다고)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어떤 계명입니까? 모든 계명이 한 가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요일 4:7) …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즉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마음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5. 그리스도를 모름

바로 이 지점에서 부자가 지옥에 떨어진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는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가 주님을 몰랐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첫째 증거는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며, 둘째 증거는 그가 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비유는 이렇게 부자의 삶을 묘사합니다.

(눅 16:19)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기며 호화스럽게 살았다.

그가 악한 일을 했다는 묘사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풍요롭고 즐기며 살았습니다. 모두가 동경하는 삶 아닙니까? 문제는 그가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마땅히 했었을 선한 일을 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눅 16:20) 한편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는 부스럼투성이의 거지가 누워 있었다. (눅 16:21) 그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 하자 심지어 개들까지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 거지 나사로가 병들고 굶주린 채 누워있었지만 그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 했습니다. 그를 도울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이는 누구였습니까? 바로 그 집의 주인 부자였습니다. 나사로의 처지는 그 부자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그 부자가 혹시 나사로를 몰랐던 것은 아닐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제 집을 드나들며 나사로를 보지 못 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오늘 본문의 후문맥인 27절에서 부자는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소서.’ 그가 나사로를 보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이야말로 그가 주님을 모른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그런 이의 삶에 대해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이 묘사가 바로 이 부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6. 주님을 아는 성도

그럼 이 비유에서 부자로 등장하는 이들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킬까요? 1차 청중은 바로 당시 현장에서 이 비유를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전문맥에서 예수님은 재물을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비유의 결론이 이것입니다.

(눅 16: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자신을 위해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러면 그것이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집으로 맞아들일 것이다.

이 땅에서 돈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돕는 데 쓰라, 그러면 하나님이 그 선한 삶을 받으시고 영생의 선물을 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를 들은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눅 16: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비웃자

그들의 비웃음을 들으신 후에 이 부자와나사로의 비유를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유 속 부자가 누구를 말하는지 분명해 지지 않습니까? 그들은 돈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습게 여기는 바리새인들이며 자신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쓰면서도 이웃을 위해서는 매번 인색해지는 모든 이들을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듣고 ‘천국에 가려면 선행을 많이 해야 하는구나’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면 이는 분명 오해요, 복음을 인간의 행위를 의지하는 율법주의나 다른 종교의 메시지처럼 왜곡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함은 주님을 앎의 결과라고 거듭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을 모르면서도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얼마든지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행함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인간의 자기자랑일 뿐입니다. 참된 선행은 선하신 주님을 알면 알수록 그 분의 선하심과 너그러우심을 닮아가서 아들을 내어주더라도 죄인을 사랑하지 않으실 수 없는 그 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 우리도 그 분처럼 사랑을 행하기를 원하게 됨으로써 맺는 열매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관심은 얼마나 선행을 더 하면 안전하게 구원의 보험을 들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정말 주님을 알고 친밀해져서 그 분을 닮아갈 수 있을까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 답을 예수님은 비유의 후반부에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다음 주에 묵상하겠습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새로운개혁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이 주님을 알고 그 음성을 듣는 양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