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6 “주님을 아는 길”(눅 16:23-31) – 김도완 목사

9월 14, 2026

Series: 주일예배

Book: 누가복음

눅 16:23-31/주님을 아는 길

260906 주일설교 믿음14

1. Don’t Look Up

2022년에 나온 돈룩업이란 영화를 혹시 보셨습니까? 풍자코미디의 명작이란 평가를 받은 이 영화는 6개월 안에 지구와 충돌하여 인류를 완전히 멸종시킬 만한 위력을 가진, 에베레스트산만한 혜성이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두 천문학자가 이 위험을 알리려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을 대중과 사회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방송국은 그들의 고발을 예능처럼 만들어 시청율을 올리는데 쓰려 하고 이들을 먼저 만난 정치인들은 지지율을 얻기 위해 이들을 이용하고 기회를 놓친 반대쪽 정치인들은 상대당이 지지를 얻지 못 하도록 하려고 이 과학자들을 거짓말장이, 선동꾼으로 몰아갑니다. 대중은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시위를 하고 대통령마저도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넘기기 위해 이들의 외침을 이용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핵폭탄으로 혜성을 날려버리는 계획이 수립되어 우주비행선이 출발했지만 이 혜성을 작게 나뉘도록 파괴하여 바다에 떨어뜨려 그 안에 들어있는 값비싼 광물을 가지려는 계획을 세운 재벌과 그에게서 뇌물을 받은 대통령에 의해 계획이 취소됩니다. 결국 이 재벌의 혜성수거계획은 실패하고 혜성과 부딪힌 지구 위의 모든 생명은 멸종합니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어쩌면 사람들이 저렇게 무지하고 고집이 셀까 하고 답답해 할 것입니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인류공멸의 위기를 코앞에 두고도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생각하느라고 경고를 무시하거나 이용합니다. 모두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이익이 더 중요하기에 그들은 경고를 진지하게 듣고 대응하지 못 합니다. 정말 한심한 사람들이라고 탄식만 하고 나온다면 이 영화를 제대로 본 것이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고발당하는 이들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 다름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야말로 자신의 이익 때문에 걱정하고 근심하고 속이고 파괴하고 전쟁하고 착취하느라 인류를 공멸로 몰고가는 심판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못 듣고 살아가는 이들이 아닙니까! 우리야말로 다가오는 심판의 경고에 귀를 막고 지금 여기서 영원히 살 것처럼 부질없는 시기와 다툼 속에 살아가고 있지는 않느냐는 말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 영화속 인물들과 얼마나 다른지 혹은 같은지를 보여주는 비유를 방금 읽었습니다.

2. 예수님을 아는가

오늘 본문은 지난 주에 읽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의 후반부입니다. 지난 주에 살펴보았죠? 부자와 나사로의 운명이 지옥과 천국으로 갈라진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과의 관계였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이 그 이름을 부르는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반면 부자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아무 상관이 없는 관계였습니다. 부자가 주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은 그가 이웃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안락만을 구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 사랑은 이웃사랑의 삶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반복해 강조된 진리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럼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알고 그 분과 바른 관계를 맺어서 심판에 이르지 않을 수 있는지를 다룹니다.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가 가르쳐 줍니다.

3. 영원한 운명

부자는 지옥의 고통에서 안식을 찾으려고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물 한방울이라도 적시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한 번 들어선 운명은 바꿀 수 없고 그 사이의 왕래도 불가능하다고 답합니다. 그러자 부자는 아직 선택의 기회가 남아있는 자신의 다섯 형제라도 이 지옥의 운명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가 생각한 방법은 죽은 나사로를 아버지의 집에 보내어 그들에게 이 사후세계의 운명에 대해 증언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 곧 구약성경이 있으니 그 성경을 읽고 들으면 된다고 답합니다. 부자는 다시 요청하기를, 그들이 회개하려면 성경만으로는 안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서 증언하는 기적같은 일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은, 성경을 읽고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으로도 회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하고 비유가 끝이 납니다.

4. 기적을 바라는 믿음

이 후반부가 다루는 것은 사람을 회개에 이르게 하는 힘이 기적에 있느냐, 성경에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부자는 기적에 필요하고 고집합니다. 이는 그 자신의 경험과 세태를 반영한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유대사회에서 부자는 어떤 식으로든 성경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정치와 종교와 사회가 완전히 통합되어 있는 1세기 유대사회에서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회당에서 율법강론을 듣지 않고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게다가 경제권력을 계속 유지하고 키워가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의 종교와 정치권력을 쥔 제사장과 사두개인, 바리새인들과 친분을 맺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즉 그는 이미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 주신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너무나 자주, 익숙하게 들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말씀은 귀기울여 듣지 않았고 그 결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사랑하는 관계를 맺지 못 했고 그 결과 이웃사랑의 열매도 맺지 못 했습니다. 자신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다섯 형제도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서 율법을 듣고 있지만 자기처럼 전혀 회개하지 않은 상태도 살다가 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정신이 번쩍 들게 하고 깨우쳐 회개케 하려면 적어도 죽은 이가 살아나 가서 증언하는 기적이 필요하다고 고집한 것입니다.

그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매주일 설교를 듣지만 뭔가 더 필요하다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기 위해 이보다 더 강력하고 충격적인 어떤 기적이나 능력이나 증거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병자가 벌떡 벌떡 일어나고 성령받으라, 하면 방언과 예언을 하고 앞일을 알아맞추는 능력이나 문제를 바로바로 해결하는 기도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목사나 뭔가 속시원한 증거를 얻고 뜨거운 신앙생활을 하고픈 이들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까?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설교를 듣고 양육을 받는 일은 지루하고 피곤한 일이라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5. 충분한 말씀

이 부자의 고집에 대해 아브라함은 거듭하여 성경말씀을 들으라고 권하고 성경을 듣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기적을 보고도 돌이킬 수 없다고 답합니다. 이 비유의 결론인 31절을 보십시오.

(눅 16: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 답은 두 가지 진리를 일깨웁니다. 첫째는 성경말씀은 회개에 이르게 하는 능력으로 충분하고도 남는다는 것이요, 둘째는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말씀으로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켜 회개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은 이 말씀이 곧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십니다. 말씀이 이토록 위대한 우주를 창조한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면 그 말씀이 죄인의 마음에 회개하는 마음을 창조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말씀은 수술실에서 메스가 암덩어리를 잘라내듯 우리 마음의 악한 생각을 모두 잘라내는 능력이 됩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말씀은 모든 것을 드러내는 거울과 같이 우리를 낳낳이 드러내십니다. 또 말씀은 우리 마음에 거룩함을 창조하십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6. 고집스러운 마음

이런 말씀을 듣고도 돌이키지 못 하는 마음은 왜입니까? 돌처럼 그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부자가 그랬고 그의 형제들도 그러했으며 이 시대에도 많은 이들의 마음이 그러합니다. 그런 마음을 스가랴 선지자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슥 7:11) 그러나 그들이 듣기를 거절하며 고집스럽게 등을 돌려 귀를 막고 (슥 7:12) 그 마음을 돌처럼 굳게 하여 내가 옛날의 예언자들을 통해 내 영으로 전한 율법과 말을 듣지 않으므로 내가 대단히 화가 났었다.

그들은 듣지 않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있는 말씀조차도 듣지 않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사 6:9) 그러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는 계속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계속 보아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라. (사 6:10)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는 막히고 눈은 감기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 말씀은 반어법으로, 그들이 마음이 고침받을까봐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마치 합리적인 소비인지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사기로 결심한 명품가방에 대해 리뷰를 읽으면서 별 5개짜리만 읽고 1개짜리는 읽지 않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 가방의 단점을 읽으면 마음이 불편해 지기에 아예 읽지 않기로 작정한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왕이 되어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어 하나님이 왕되신 삶에 대해 들으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안 듣거나 예배의 자리를 피하거나 들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립니다. 돌이키지 못 하는 것입니다.

7. 말씀을 듣는 마음

이런 마음에는 죽은 나사로가 살아가는 기적이 일어나도 회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실제로 벌어진 일이기도 합니다. 요 11장에서 베다니의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다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리시자 어떤 반응이 일어났습니까? 두 가지 완전히 다른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요 11:45) 마리아를 위로하러 왔다가 이 (나사로가 살아나는) 광경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요 11:53) 그 날부터 그들(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기적으로 믿은 자들이 있는 반면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후자는 예수님의 기적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자신이 왕이 되어 살아가기로 작정한 상태였고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왕이 되어 살아가는 마음부터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이 들리고 그 때에는 살아계신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살아계신 말씀이야말로 진정으로 회개에 이르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알면 알수록 그 분의 더 큰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럴수록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는 성도로 자라갑니다. 그래서 사랑의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이는 그 분과 함께 머무는 곳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 분이 이루신 십자가의 의로 구원받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며 천국백성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